비밀

저는 남들이 모르는 나만의 비밀이 있어요.

세상에 자랑하고 싶지만 자랑하는 순간 비난으로 바뀌는 비밀이요.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몇년 전 그녀를 우연히 만났어요.

초록 모자를 쓰고 어머니와 며칠 전 대만 여행을 다녀왔다며

신나고 밝게 이야기하던 그녀 미소에 취해,

돌아가려던 그녀를 붙잡고 용기를 내 번호를 달라고 말해버렸죠.

저와 거리가 있어 자주 만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그 미소를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어요.

우리는 정말 많은 곳들을 다녔고 맛있는 것들을 먹었고

같이 웃었고 서로를 탐닉했어요.

보통의 연인이 아니었기에 일반적인 연애에서 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았죠.

전부 기억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나열한다면

아마 몇시간은 이야기할 수 있을거에요.

정말 말그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과 희노애락을 함께했어요.

처음에는 그녀에 대해 잘 몰라서 그저 행복했어요.

하지만 신은 우리들을 그저 좋게만 바라보지 않았나봐요.

어떤 계기였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나지 않아요.

그런거 있잖아요. 갑자기 느껴지는 이상한 기분? 아니면 눈치? 같은 것이요.

생각없이 만나며 데이트를 하다가 문득 행동에서 간격같은 게 느껴졌고

그 간격의 틈은 절 진실로 이끌었죠.

예전 소설에서 보던 문장으로 글을 적었어요.

"진실은 매력적인 추녀의 얼굴 같은 것이라 끔찍한게 분명한데도
더 자세히 알고 싶게 하는 욕망이 든다."

헤어진 후 연락이 안되고 보고 싶어도 찾아갈 수 없고

가끔은 전 날밤 홀로 모텔에 남겨져 새벽에 찾아오는 그녀를 기다리곤 했죠.

그래서 다른 남자가 있는게 아닐까 지레짐작만 했어요.

어쩌면 제가 마음을 얻을 수 있다는 혼자만의 자신감이 있었던 것일 수도 있죠.

그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때 알게 되었어요.

'아...내가 가질 수 없는 사람이구나'

한 쪽에서 손을 놓으면 언제든 쉽게 끊길 인연이었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냥 직접 이야기 해주길 기다렸어요.

그 해는 펜데믹이 들이닥치고 태풍이 찾아왔어요.

이후엔 투자하던 자산들도 전부 바닥이 어딘지 확인하러 가기도 했어요.

그녀에게 큰 마음을 먹고 모질게 이야기했어요. 빠르게 결정해달라고.

그러자 그녀는 제게서 숨어버렸죠.

그런데 그녀랑 연락하지 않는 동안 여러 생각과 함께
제가 한 말이 너무나 후회가 되는 거예요.

그녀를 만나면서 제가 그녀에게 쓰임받는 느낌이 행복하고 좋았어요.

저같은거 그냥 한순간에 버려져도 그녀가 함께 있던 순간만 즐겨준다면
좋다고 생각했어요.

지우려고 마음을 먹었는데 연락이 없는 하루하루가 너무 괴로웠어요.

그래서 그녀에게 다시 매달렸어요.
언젠간 버려질 것을 알면서도 마음에 들기 위해서 더 노력했어요.

가끔은 절 버리지 말라고 빌어보기도 했죠.

한편으론 저만 아는 그 답답한 상황이 빨리 해소되길 바랐어요.

그녀의 선택이겠지만 절 버리는게 아니라 저는 신경도 안쓰면서

그녀가 가족이야기를 하거나 가족과 연락하는거요.

마치 없는 사람처럼 절 애용하는 도구나 개마냥 대해주는 걸 기대했죠.
- 너무 변태같은가요?

어쨋든 마음은 아프지만 이미 제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걸요.

그리고 일 년정도 지난 뒤 차 안에서 조용히 그녀에게 가족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녀의 첫 반응은 의외였어요.

그냥 모른척 하지 그랬어...

그녀는 모든 걸 체념한 듯 자신을 욕해도 좋다고 했어요.

무슨 말이든 해도 괜찮다고 했죠.

그리고 그녀는 울었어요.

저는 그녀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사실 괜찮은건 그녀가 아니라 저 였거든요.

이후에 몇 달 뒤 그녀는 제게 가족사를 이야기 해 주었어요.

저는 그녀가 그렇게 말해준 게 고마웠어요.

그녀가 저에게 솔직해져 용기낼 때까지 기다렸거든요.

그녀도 제게 이야기하기까지 많은 고민을 했을거라 생각해요.

제가 그 순간 그녀에게 할 수 있는건 그녀의 가정에 방해되지 않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 밖에 할 수 없었어요.

이제는 그녀가 너무 좋아요.

그 이후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어요.

또 다른 일이 생기기 전까지는...

비극은 언제나
발 뻗고 잘 때쯤 찾아온단다.

그녀의 생일즈음 꽃을 전달해주고 집에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온 연락이 문제였죠.

평소 잘 연락을 하고 지내는 사람이 아니기에 별 생각 없이 전화를 받았어요.

혹시 누가 제 주인이 맞냐고...

아직도 관계를 이어가는 중이냐고 묻길래 요새 너무 행복하다며 자랑했죠.

그 사람은 제게 이상하다면서 스크린샷을 3장을 보내주었어요.

스크린샷의 내용은 저에게 너무나 충격적이었어요.

제가 만나고 싶다고 했을 때 다이어트 핑계를 대던 그녀가 "회는 0칼로리"라면서 글을 썼어요.

그리고 하나 더 보내줬는데 "꼬맹이한테 나쁜 짓을 한 것 같다"는 글이었거든요.

다른 글에서는 그녀의 스타킹을 찢고 행복해했다는 글도 보았어요.

그녀가 누굴 만나는 것에 대해 기분이 나쁘거나 화가 나지 않았어요.

다만 저에게 숨기고 만났다는 사실이
마음 한 켠에 마치 총을 맞은 것 마냥, 누군가 내 심장을 쥐어 짜는 것 마냥
아파왔어요.

특히나 마지막 글에서 보다시피 제가 아는 그녀는
만나서 바로 플을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까요.

한번만 만난게 아니었을테니까요.

분명 일을 하는 중이라고 하고, 다이어트 한다고 했으면서
굳이 왜 내게 숨기고 만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가끔 제가 그녀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누군가를 불러서 같이 있어도 괜찮다고 까지 이야기 했는데...

진실은 그녀만 알겠죠.

저는 수업을 듣고 있었는데 이 일이 터진 후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어요.

하루는 수업을 빠지고 그녀를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그녀의 회사쪽으로 아침에 가 기다렸어요.

아침 일찍 연락이 닿지 않아서 무작정 기다렸죠.

하지만 출근하는 사람들 중에 그녀의 차도 그녀도 볼 수가 없었어요.

오전 10시가 되어서까지도 말이죠.

저는 혹시 출근을 안한건가 궁금해서 회사에 전화를 걸었죠.

그녀가 오래 전 회사를 관두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어요.

그녀에 대해 알 수 없는 괴리감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 긴 시간동안 함께 추억을 나누며 행복했던

제가 알던 그녀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제가 그녀를 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제가 그녀를 배려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이었을까요?

그녀가 말하는 제 존재에 대해 의문이 들기도 했죠.

하지만 굳이 이런 기분에 모든 걸 들춰내서 싸우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원하는건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달라는 것보다
무슨 상황이든 제 곁에 있어달라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몇 년 전 저보다 스스로 성장했을 수도 있죠.

매주 목요일은 그녀가 피부미용을 받으러 원마운트에 가요.

저는 그녀를 만나러 가면서 속으로
계속 곁에 있어달라고 떠나가지 말라고 되뇌었어요.

그녀는 저를 그 날 아웃백에 데려갔어요.

언젠가 그녀가 먼저 말해주길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 날만큼은 본심이 먼저 나와버렸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야기할 때
계속 소름이 돋고 이젠 끝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무서웠어요.

하지만 다른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아
3주동안 아무것도 못한 내 자신을 생각하면 용기내 이야기를 꺼내야했죠.

차가 바뀐 것부터 직장을 그만둔 것, 그리고 다른 애를 만났던 것 까지...

어떻게 이야기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순간에 제가 기억한 건 단 하나예요.

그만하자는 이야기가 아니예요. 그 동안 왜 말하지 않은거죠?

그녀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저는 그녀랑 헤어지고 차에 와서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감정적인 상태였거든요.

몇 분동안 그녀를 다시는 못 볼 것 같아
혼자 차 안에서 눈물을 흘리다 엑셀을 밟았어요.

그냥 좋은 관계로 모른 척하고 지내면 될걸
괜히 내가 꺼집어 낸건 아닌지 후회도 되었어요.

사고가 날까봐 진짜 천천히 차를 몰고 집으로 향하던 중 그녀에게 전화가 왔어요.

다시 아까 그 자리로 와

심장이 뛸 듯이 기뻤어요.

그리고 그녀를 만나 싸대기를 맞았어요.
하지만 그 아픔보단 그녀가 저를 다시 불러줬다는 기쁨이 더 컸어요.

저는 그녀에게 결국 모든걸 바쳤어요.

제 몸, 마음 그리고 자존심까지도 모두요.

사랑은 비극이어라
그대는 내가 아니다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

처음 이 글을 쓸 때는 행복한 추억들로 가득 채우고 싶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행복했던 순간들을 되돌아봤죠.

그녀와 함께 한 크리스마스 이브 부터 그녀의 회사에서 다리가 풀린 일,
함께 자주 걸었던 일산호수와 항상 그녀가 기다렸던 스타벅스,
눈이 많이 왔던 강남역, 개화기 옷이 잘 어울렸던 익선동,
광화문, 을지로, 이태원, 서울숲, 아쿠아리움, 민속촌, 애버랜드, 롯데월드,
드래곤시티, 웨스틴조선, 파크하얏트, 노보텔 엠베서더, 이스턴&웨스틴 파리
일산, 파주, 김포, 수원, 천안, 강릉 등등등등

그녀와 함께 보냈던 행복한 하루하루가 잊혀지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나요.

하지만 글을 쓰기엔 너무 장황해질 것 같았어요.

사실 글을 쓰다가 중간에 지루해져서 지워버렸죠.

아마 전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나 어디를 가든 그녀가 기억날 거예요.

그녀와의 행복한 기억들이 저 곳곳마다 서려있으니까요.

그녀가 가족에 대해 이야기 하던 날, 제게 했던 이야기가 생각나요.

우린 미래가 없잖아.

우리의 관계가 힘들었던 상황에 그녀는 제가 어떤 생각과 태도로 그녀를 대했는지 말하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요.

물론 미래를 생각하고 말한건 아니었어요.
미래를 꿈꾼 것도 아니었구요.

제가 원한건 그녀가 제 곁에 있어주는 거예요.

저는 그녀를 너무 사랑하게 되었거든요.

난 우리를 영영 잃지 않아,
너도 영영 그럴 거지?

벌써 새벽 4시네요.

글을 어떻게 써야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주말 내내 써봤는데 쓰고 지우고만 반복했어요.

제 마음이 어떻게 전달되었는지 잘 모르겠어요.

그 당시에 그녀의 감정이 어땠는지 듣긴 했지만 아직도 저를 밀어내는 중인지,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없는 상대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요즘 많이 힘들어해서 오히려 제가 이런걸 물어보는게
더 부담이 되는건 아닌지 한편으론 염려스러워요.

그녀는 제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해요.
저 또한 그녀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려고 노력하죠.

하지만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는 것도 알고,
관계가 항상 좋을 수만 없다는 것도 알죠.

어짜피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고, 실수도 하고, 자연스럽게 늙어가요.

지지난 주 금요일,

간다고 이야기를 해야하나 말아야하나 많은 고민도 했지만
어쩐지 가야할 것만 같았어요.

그녀를 찾아갔을 때 주차장에도 스벅에도 그녀가 보이지 않아 당황했어요.

맥도날드에 있을까 싶어 잠깐 나온 문 앞에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죠.

마치 길을 잃은 어린아이 같았어요.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고 방황하는 모습이었죠.

제가 뒤에서 그녀를 붙잡자 그녀는 손에 핸드폰을 쥐고
놀란 눈으로 저를 쳐다봤어요.

핸드폰에는 차트가 켜져있었죠.

그녀는 제 얼굴을 보더니 울기 시작했어요.
화장기 없는 얼굴로 너무나도 마음아프게 울었어요.

희망이 없잖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곤 저에게 죽을 생각까지 했다며 구슬프게 울었어요.

참 다행이예요.

그녀가 이렇게 힘겨워 할 때 제가 옆에 있어줄 수 있어 정말 다행이예요.

어쩌면 지금이 그녀가 제게 보여줬던,
그리고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가장 솔직한 모습일지도 몰라요.

저는 이런 그녀의 모습조차 정말 사랑스러워요.

한때, 저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몇 차례씩 무너졌던 적이 있죠.

하지만 지금은 무너질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해요.

살아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다.

저는 미래를 예언하거나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믿지 않죠.

솔직히 무언가를 맹신적으로 믿는다는건 저에게는 어려운 일이예요.

신의 존재도 없는 것보다 있는게 더 낫다고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거죠.

그녀가 힘들어하며 제게 돈을 달라고 했을 때, 많은 생각이 들었어요.

관계가 돈으로 이어지면 그건 더 복잡해지니까요.

얼마나 힘든지 이해하지만 돈 때문에 관계가 망가지는 것은 더욱 고통스러워요.

그래서 처음에는 언제 갚든 빌려주는 차용증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년뒤가 되든 2년뒤가 되든 차차 갚을 수 있을 때 돌려주는 방식으로요.

지난 주 토요일 그녀를 만나고 차용증을 쓰려고 했어요.

여러가지 그녀가 돈을 갚을 때까지 제가 원하는 조건들도 생각해 보았죠.

1. 무슨 일이든 한달에 한번 이상 얼굴 보기

2. 한달에 한번 이상 같이 사진찍어주기

3. 한달에 한번 이상 편지 써주기

아마도 1번은 들어줄 거 같은데 3번은 어렵겠죠? ㅋㅋㅋㅋ

그래서 그냥 차용증은 포기하기로 했어요.

어떤 희망적인 이야기로 그녀를 설득할 자신은 없어요.

그러나 저는 그녀가 힘들어해도 떠나지 않고 곁에 있을 수 있어요.


이건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어요.